마음을 다듬으며 명상일기

전생은 있는가?

빛속으로 2015. 8. 15. 12:44

 

 

           전생은 있는가?

 

 

  불멸하는 성품은 업을 따라 끊임없이 윤회하며 업이 다하는 날에야 비로소 생사의 수례바퀴는 멈추는데 불멸의 문을 열기 위해 처절하리만큼 수행에만 전념하던 날이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는 엄마와 웃고 떠들며 놀다가 사르르 꿈나라를 날고 아내도 곧 잠에 들었다. 아이를 껴안고 잠든 아내 옆에서 나는 가부좌를 하고 참선에 들었는데
  “아직도 안 자요!”

  아내의 음성이 고요한 적막을 깼다.

  모든 소리가 사라진 너무도 조용하여 먼지가 날리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은 진공상태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날카롭고 짜증스런 음성에 눈을 번쩍 떴는데 <아직도 안 자요!>라는 말은 예리한 비수처럼 가슴을 찔러왔다.

  난 화들짝 놀라서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니 시계바늘을 누군가 돌려놓은 듯 훌쩍 흘러 어느덧 새벽 3시가 지나고 있었다. 잠시 앉아 있던 것 같은데 언제 시간이 그렇게 흘렀는지...
  그나저나 아내는 내가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모두 잠든 한밤중에 홀로 앉아 깊은 침묵에 들 때면 생각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그러다가 나도 사라지는 것 아닌가 하는 존재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일곤 했는데, 아내는 시집와서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저러다가 남편이라는 작자가 어디론가 감쪽같이 사라지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는 아내랑 아이랑 단출한 세 식구가 즐겁게 외식도 자주 다녔는데 요즘은 물 위에 뜬 기름방울처럼 가족과도 잘 어울리지 않고 동창들 모임에도 번번이 빠지기 일쑤였다. 모임에 참석치 않는 나에 대하여 친구들은 빠지지 말고 꼭 참석하라 했는데 하루는 친구 둘이 집으로 찾아와 나를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술과 음식을 시켜 먹으며 말했다.
  “집에만 쳐 박혀서 뭐 그렇게 재미없게 사는 거야. 너 혼자만 생각하지 말고 집사람도 생각해 줘라.”
  집에만 콕 박혀 두문불출하는 나를 우정으로 질책하며 웃고 울기도 하며 서로 어울려 사는 것이 인생이 아니겠느냐고 모임에 빠지지 말고 자주 참석할 것을 권유하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근심과 걱정 괴로움과 번민을 안고 사는데 이렇게 고요하고 평온하게 사는 게 얼마나 좋은 거냐.”
  “야!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생각하고 그렇게 살면 어떻게 되겠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처럼 고요하고 평화롭게 산다면 그처럼 좋은 게 있겠니? 아주 좋은 일이지.”
  나의 막힘없는 답변에 친구들은 설득하러 왔다가 할 말을 잃고 돌아갔는데 나는 나 스스로의 삶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가지고 있지만 친구들 말처럼 익숙하지 않는 삶의 방식이 아내에게는 어쩜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수행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처럼 욕망을 좇으며 웃고 울며 무리 지어 살아도 고난과 괴로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수행하기 때문에 아내가 더 고통스러운 삶의 조건이 되는 건 아니다.
  천지가 본래 어두운 것이 아니라 태양을 가린 먹구름이 문제이듯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먹구름이 마음에 끼어서 근심하고 슬퍼하며 괴로워하고 번민한다. 태양은 언제나 찬란하듯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걷어 내면 맑고 밝은 법의 세계다.
  허공에 먼지가 날리는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한 정적 속에서 아내의 짜증스런 어투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찌르면 너무 고통스러웠다. 폭풍의 바다처럼 마음이 혼란스럽고 괴로워서 어떻게 왜 우리가 부부가 되었는지에 대한 원초적인 의문에 빠졌다.

  목숨처럼 어쩜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간직하던 화두조차 내던지고 아내와 난 무슨 사연으로 부부가 되었으며 부부란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 오로지 그 생각에 골몰하였는데 며칠 후 전생의 일이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머리를 파르라니 깎고 회색 옷을 입은 젊은 승려였는데 나라에 전쟁이 터져 물밀듯 적군이 침입하여 보이는 대로 사람들을 칼로 베고 창으로 찔러 죽이므로 무서운 침략자들을 피해서 난 산속으로 도망을 갔다.
  살기등등한 침략자들을 피해 다른 사람들도 도망을 다녔는데 그 틈에 끼어 외딴 폐가에 몸을 은폐하고 적군의 긴 행렬이 지나가는 것을 숨을 죽이며 지켜보았다. 무기를 든 난폭한 침략자들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양민들 중에 한 낭자도 있었는데 산중에서 이리저리 함께 숨고 도망 다니면서 정이 들고 연민이 싹텄다.
  그때 사모하던 마음이 이어져서 낭자는 여인으로 태어나 아내가 되고 승려는 지금의 나로 남편이 되었음을 알았다.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에서 함께하며 연모하던 마음이 낭자는 세속인도 출가인도 아닌 사람의 아내가 되고 승려는 남자로 태어나 세속인으로 수행자의 길을 걷고 있음을 알았는데 그렇게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어 가정을 이루고 있음을 알았으나 그것이 생사의 문제를 포기할 만큼 중대한 사유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난 명상에서 깨어나 옆에서 잠든 아내를 바라보았다. 새근새근 잠을 자는 아내를 보면서 전생으로부터 온 소중한 인연이지만 수행을 포기할 수 없음을 마음으로 양해를 구했다.

  아내는 밤이 깊도록 오뚝하게 앉아있는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아직 안 자요!”라고 짜증 섞인 어투로 말하곤 했으나 새벽 세 시를 가리키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면서 “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 이젠 자야지.”라고 말하며 그날 이후로는 마음에 동요 없이 오롯이 참선에 몰두했는데 그런 며칠 후 참선 중에 문득 아들이 나타났다.

  귀염둥이 외동아들은 멀리서 나를 부르며 외쳤다.
  “아빠! 어디로 가세요! 나를 두고 가시면 안 돼요. 이제 그만 돌아오세요!”
  아들이 간절하게 부르는 외침에 놀라 삼매에서 화들짝 깨어났다. 수행을 계속 진행하면 아들과의 사이가 더욱 벌어져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처럼 영원히 이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밀려오면 애절한 부자지간의 정 때문에 곧바로 참선에서 깨어나곤 했다.
  깊은 참선 중에 어김없이 아이가 나타나서 내가 앞으로 더 못 가게 뒤편 저 멀리에서 손짓하며 돌아오라고 애원했는데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인 외동아들의 어리광에 마냥 행복했고 초등학생에게 백 점은 흔한 것이지만 백 점을 받았다고 시험지를 들고 와서 자랑하는 꼬마를 향한 각별한 애정은 나를 꼼짝 못하게 사로잡았다.

  아들이 나타나서 ‘아빠! 어디 가세요. 이제 그만 돌아오세요!’라고 호소하듯 붙잡으면 수행을 멈출 수밖에 없었는데 매번 수행의 발길을 멈춰야 하는 것은 단장의 고통이었다. 깊고 깊은 사랑과 애정과 은혜의 수렁에 빠져서 도대체 나와 아들은 어떤 인연으로 만난 것일까 하는 생각에 잠겨 들었다

  그 며칠 후 전생의 일이 tv영상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나이 많은 노스님과 젊은 승려가 눈 덮인 겨울의 하얀 들판의 계곡을 따라 흐르는 시내의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노스님이 앞장서서 징검다리 돌을 조심스럽게 밟으며 건너고 있었는데 날씨가 추워서 살짝 언 돌을 밟으면서 그만 균형을 잃고 미끄러지며 물에 풍덩 빠졌다.
  살얼음이 언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자 뒤에 따라 오던 젊은 승려가 에이듯 차가운 물로 덤벙덤벙 걸어와서 스승을 부축해 강가로 옮겼다. 스승을 백사장에 앉히고는 허허벌판 찬바람에 덜덜 떠는 노인을 위하여 주위에서 나뭇가지를 주워 모아 불을 피워서 따뜻하게 보살펴 주었다.
  그 당시 나이가 많은 늙은 승려가 현재의 나고 젊은 승려는 아들로 물에 빠진 나를 부축해 강가로 옮기고 불을 지펴서 따뜻하게 해 준 그러한 인연으로 부자의 연을 맺게 되어 알뜰살뜰 보살피며 양육해 주었음을 알았다.
  그러한 전생의 인연을 본 이후로는 참선 중에 아들의 영상이 나타나도 전처럼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은 아니었다. 물안개처럼 아련하고 애절한 감성이 출렁였지만 수행에 큰 장애가 되지는 못했는데 그러면서 점차 횟수가 줄더니 사라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랑과 은혜의 속박에서 벗어나 먼 훗날의 아름답고 거룩한 만남을 위한 불멸의 깨달음을 향해 오로지 뼈를 깎듯 정진해 갔다.


  삭막하고 혹독한 계절이 없었다면 어찌 매화꽃이 저토록 향기롭고 아름다운 줄을 알리오!

  나는 수행 중에 아내와 그리고 아들과의 전생 인연을 보았는데 생이란 단 한 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생과 전생이 첩첩하게 이어져서 바닷가에 철썩이는 파도와 같이 헤아릴 수도 없음을 알았다.
  사람들은 흔히 전생을 믿지 않고 부정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해서 전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안개가 짙으면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데 칠흑같이 어두워서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오리무중이라 해도 해와 달과 산과 강과 동식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눈이 밝은 사람은 하늘도 구름도 해도 달도 색깔도 세상 만물을 다 보고 알지만 태어날 때부터의 맹인은 하늘도 구름도 해도 달도 색깔도 본 적이 없는데 본 적이 없다고 해서 하늘도 구름도 해도 달도 색깔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과연 진실하고 옳은 말이라 할 수 있겠는가!
  기억할 순 없어도 누구나 어머니 태안에 10개월 동안 있었던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전생을 알던 모르던 인정하던 부정하던 주관적인 관념에 따라 진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 오고 감자를 심으면 감자를 캐며 배나무를 심으면 달고 시원한 배를 따서 먹을 수 있는 것처럼 현생은 내생을 감출 수가 없어서 메아리는 ‘선(善)’하면 ‘선(善)’하고 ‘악(惡)’하면 ‘악(惡)’하며 멀리 산을 돌아서 온다.
  비록 전생을 몰라도 윤회와 인과를 믿으면 지금은 설령 가난하고 비참하게 살더라도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장래엔 잘살기 위해 베풀면서 복을 짓고 악행을 하지 않고 선량하게 살려고 노력할 것이지만, 윤회와 인과를 부정하면 욕망을 따라 제멋대로 그릇되고 악하게 살 것이니 결국 타락하고 파멸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인과의 토대 위에서 바르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 더 보람되고 훌륭한 삶의 결실을 수확할 것임은 자명하다.

 

 

       < 천상의 무지개 > 수필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