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일기

반야심경일기(모지사바하-1)

빛속으로 2008. 8. 20. 12:08

 

 

 

2007년 3월 8일

 

 

내 블러그를 찾아 오신 분의 자취를 따라서 방문하니 그곳은 수필가의 방이였다.

나는 그곳에서 몇 편의 글을 읽었다.

흔히 일상에서 겪게 되는 상황을 깊은 사유의 필치로 그린 공간에는 많은 분들이 찾아와서 쉬기도 하고 댓글을 달며 지식과 철학을 공유하고 있었다.

행복론에 대한 글도 있었는데 사람은 원초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동물이라고 했다. 세기적인 철인의 말을 인용하며 실로 우리가 보편적으로 느끼고 아는 삶의 기준은 행복의 추구라 했다. 

그는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에 대하여 유형별로 나누어서 자세하게 서술해 놓았는데 사람들이 고생하며 노력해서 성취하는 곳에서 느끼는 만족이나 기쁨이 곧 행복이라고 말했다. 

며칠 전에 TV에 나와서 강연하던 모 건설회사 회장의 행복론과 내용은 비슷했는데 전체적인 느낌으로는 수필가의 사유가 건설회사의 회장님보다 더 깊었다.

하늘에서 돈이 눈처럼 내려도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처럼 욕망은 끝이 없다. 그러므로 목표를 설정하고 노력하여 성취하므로써 얻는 행복은 아침을 먹고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허기를 결코 면할 수 없다.

이어지는 수필가의 글에서 불가에선 집착을 버리면 행복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또 유가에선 욕심을 적게 하고 작은 것에 만족을 하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소유로써 행복을 느끼므로, 끊임없이 재물을 모으려 하고 더 큰 권력과 더 높은 명성을 추구하고 사랑을 더 많이 받으려 애쓴다고 하며 그와 같이 욕망에는 한계가 없는 것이 제일 문제라 말했다.

작은 것에 기쁨과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오랜 고생 끝에 성취하는 것에서 더 크고 많은 기쁨과 만족으로 행복을 느낀다면서 만약 작은 것에서 만족을 느끼고 산다면 더 많은 행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지 않겠느냐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글의 마무리에서 불가에서는 욕심을 버리고 살라 하는데 먹을 것조차 없어서 현재 끼니조차 굶고 있다면 그에게 버릴 욕심이 무엇이며, 또 병이 들어서 병석에 누워 죽어가는 사람에게 오직 생명하나 남아있는 뿐인데 거기에 더 버릴 애착이 무엇이냐고 날카로운 비수처럼 질문했다.

불가에서 인생을 고라고 했듯이 괴로움으로부터의 해방은 영원히 풀수없는 수수께끼라며, 괴로움은 아무도 해결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풀수 없는 숙제라는 말로 글의 끝을 맺었다.

그분은 해박한 지식으로 불가를 말하고 유가를 말하며 철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논리적으로 주장했는데 그러나 부처가 뜻하는 바를 진실로 모른다고 생각했다. 

생노병사의 바다를 건너서 불멸의 언덕에 오른 각자(覺者)가 부처이며, 부처에게는 근심 걱정 고통 괴로움 공포 두려움이 없다.

문자로는 불교를 알아도 불법의 뜻을 완벽하게 알지 못하므로 괴로움을 건너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라 생각했다.

수필가는 먹을 것도 없는데 버려야 할 것이 있고, 병으로 누워 끙끙 앓고 있는데 더 놓아야 할 욕심이 있는가 하고, 글을 읽는 내게 비수를 들이대며 다그쳤는데, 일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아, 정말 그렇다. 그런 막다른 골목에서 더 버려야 할 것이 있겠는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더 이상 버릴 것이 없다.' 라고 동의할 것이다. 

그러므로 괴로움은 영원히 풀 수가 없는 수수께끼 인가!

그렇지는 않다!

옛 고인은 백척간두에서 한발을 썩 걸어 나아가라 했다.

백척이라 함은 1척이 30센치이니 백척은 약 30미터다. 30미터라면 아마도 10층 빌딩의 높이보다 더 높을 것 같은데 그런 까마득한 높은 절벽 끝에서 한 발을 썩 걸어서 나가라 했다.

2층 옥상의 난간에 가까이 다가서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고 떨린다. 그런데 10층 옥상 난간 끝에서 걸어서 앞으로 가라 하니 그럼 두 발이 모두 허공을 밟게 되는데 옛 스승들은 그렇게 하라고 했다.

두 발로 허공을 밟고 선다면 곧 바로 추락하여 즉사할 것이며 숨이 멈춰 싸늘하게 식은 시체를 만날 것이다.

누가 그리 할 수 있겠는가!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뜻이 없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말 장난인데 구도자는 그런 가당치 않는 짓을 결행한다. 오직 스승을 굳게 믿고 과감히 백척간두에서 앞으로 걸어나가 목숨을 버린다. 

백척간두에서 걸어나가서 몸은 이미 죽고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곳에서 그 때 진리를 만난다. 텅 빈 가운데서 소소영영한 한 물건을 보아 깨달아서 비로소 저 언덕에 이르는 것이다.

텅 빈 가운데 신령한 물건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기 위한 지극한 자비로 스승은 사랑하는 제자를 위하여 천길 절벽 끝에서 썩 걸어 앞으로 나가라 재촉했던 것이다,

생노병사가 없는 불멸의 땅에 이르니 얼마나 기쁘며, 우주의 실상을 꿰뚫어 보는 환희를 무엇으로 대신하겠는가! 

수필가는 끼니마저 이을 쌀 한톨 없는데 버릴 것이 있으며 병들어 누워있는 하나 남은 생명 밖에 없는데 줄여야 할 욕심이 있겠느냐고 항변했지만 진실로 그 마지막 남은 하나까지도 버려야 한다.

그는 괴로움을 여윌 방법이 없다고 매우 슬퍼하면서 인류의 영원한 숙제라고 안타까워했으나 이천오백 년 전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라 무수한 도인이 탄생했으니 짧은 반야심경 속에 오롯이 담겨있다.  

청정한 본성을 모르면 천상계, 아수라계, 인간계, 축생계, 아귀계, 지옥계를 끝임없이 윤회하며 태어나는데 인간으로 태어남은 귀한 인연이며 불법을 만나기란 더욱 귀한 인연이다. 귀한 인연을 만났다면 무수한 생의 반복에서 한 생 태어나지 않은 셈치고 공부하여 불멸의 진리를 깨닫는다면 이보다 더 큰 왕대박이 있겠는가,,,!

 

            覺牛 윤철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