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스케치

[스크랩] 자성의 정체

빛속으로 2012. 7. 6. 12:18

 

 

 

 

 

  자성의 정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나는 이러한 가치관을 가지고 나는 이렇게 산다 라고 하는데 나의 정체는 무엇인가?

  나를 바르고 진실하게 아는 것이 깨달음이며 지혜다. 나의 근본은 텅 비어서 나라고 할 것이 없다. 아무 것도 없는 깨끗한 본성을 보면 죽음이 없는 세계에 이른다. 죽음이 없다는 것은 존재의 태어남이 없다는 것이며 태어남이 없으므로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 없다.

  무수한 수행자들이 오욕락의 즐거움을 버리고 생로병사를 초탈하는 진리를 깨닫기 위해 오늘도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뼈를 깎듯 정진을 한다.

  생사의 바다를 건너 피안의 언덕으로 가는 여러 방편의 길이 있는데 우리나라 조계종에서는 화두를 수행가풍으로 삼는다. 화두란 나를 찾아가는 길이며 생사의 관문을 여는 열쇠다.

  화두 중에 <내가 누구인가> 라는 공안이 있다. 과연 나는 누구며 깨달은 각자(覺者)는 나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진리를 깨달은 성자는 한결같이 나의 실체란 없다고 한다. 실체가 없는 나를 깨달아 진리를 체현한 분을 각자(覺者)라 하며 텅 빈 공(空)을 사무쳐 깨달아 아는 것이 실상이다.

  경전에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했는데 모든 것에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말씀이다. 텅 빈 공을 바르게 알면 열반에 이르며 이 공(空)을 가르치기 위해서 대답이 뻔한 나를 찾으라고 선사들은 커다란 주장자를 휘두르며 일갈한다.

  벽력같은 추궁에 화두를 들고 열심히 참구하다가 인연이 익으면 문득 낮닭 울음소리에 깨닫고, 면목이 없다는 말에 깨닫고, 복사꽃이 피는 것을 보고 깨닫고, 차를 마시면서 깨치기도 한다. 보고 듣고 아는 스스로의 성품을 깨닫는 것이다.

  6조 혜능대사는 <어디에도 머무는 곳 없이 그 마음이 일어난다>는 금강경의 한 구절을 듣고 문득 불성(佛性)을 알았으며 경허선사는 죽어서 소가 되어도 코뚜레를 꿸 곳이 없어야 한다는 말에 깨달았다. 코를 꿸 곳이 없는 자리! 그 자리가 바로 텅 빈 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텅 빈 자성(自性)을 알았다면 화두를 들고 선방을 기웃거릴 필요가 없으며 엉덩이에 물집이 생기도록 좌복 위에 가부좌를 하고 꼼지락거릴 필요도 없다. 나의 본성은 비어서 아무 것도 없는 공(空)한 것임을 확고하게 알아서 다시 의심하는 바가 없다면 온갖 속박과 굴레로부터 해방된다. 생사의 그물 위를 훨훨 날아가는 불사조다.

  내가 본래 없는 것임에도 찾으라고 고함을 지르는 것은 선사의 교묘한 속임수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어찌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신기하게 논리에 맞지 않은 해괴한 괴변에 속아서 묵묵히 앉아 참구하다가 공의 실상을 깨달아 대자유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화두를 들고 오랫동안 참구해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면 일체의 형상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인연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며 본래 나라고 할 모양이 없음을 바로 관조하라. 내가 없으므로 그러한 까닭에 나를 찾아서 두 눈을 부릅뜨고 참구하던 의심덩어리인 화두를 비롯하여 일체의 논리와 학설과 신념까지 몽땅 팽개쳐 버리고 아무 것도 없는 깨끗한 성품을 보라.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의 형상과 생각과 인식이 아지랑이처럼 실체가 없으며 물방울이나 허수아비와 같다.

  나무로 뼈대를 삼고 볏짚으로 살을 붙여서 노끈으로 묶고 옷을 입혀논 허수아비와 같은 것이 사람이다. 뼈대에 힘줄과 핏줄로 엮은 살이 붙어 있고 얇은 가죽으로 감싼 몸뚱이에 옷을 걸친 허수아비가 걸어다니고 말하며 먹고 자는 것이라 생각하면 허수아비가 하는 일들이 그렇게 기특하거나 교묘할 것이 없지 않은가. 설령 어느 날 갑자기 허수아비가 죽었다고 해도 울고불며 애통해서 통곡할 것도 없다.  

  호젓한 숲속의 맑은 호수에 흰구름이 둥실 떠서 지나가는 것처럼 한가롭고 평화로워라. 

 

 각우 윤철근

       

출처 : 도솔천 명상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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