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고향 친구에게

산책길

빛속으로 2009. 11. 9. 13:31

 

 

 

산책길

 

먼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 산책길을 나선다.

9월도 어느 듯 중순 한기를 느낀다.

중년의 부부인 듯 두꺼운 추리닝을 입고 활기차게 앞질러 걸어간다.

어제 밤 내린 너구리비에 풀잎은 이슬을 가득 머금고 산책길의 나무들도 머금은 물기를 바람에 우두둑우두둑 날린다. 물기를 머금은 탓인지 바람결에 더 한기를 느낀다.

이제 좀 두터운 옷으로 입어야 할 것 같다. 두터운 옷을 꺼내면 아마 아내는 벌써 그런 옷을 입느냐고 놀릴지 모른다. 그래도 춥게 다닐 필요가 없으므로 놀리듯 좀 야유를 해도 그래야 할 것 같다.

내 옆으로 달리기를 하며 뛰어가는 사람, 팔을 휘저으며 빠르게 걷는 사람, 자전거를 타고 씽씽 달리는 사람도 있고 산책길에서는 많은 사람들과 무심히 스친다.

한참을 걸으니 찬듯 느껴지는 바람결이 한결 상쾌하게 전해온다. 신선하고 싱그러운 새벽 공기가 참 좋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상쾌하고 싱그러운 좋은 느낌, 그것 마저도 마음에 오래 담아두지 말아야 한다. 오래 간직하며 좋은 느낌을 탐하게 되면 어느 사이 그것은 고통이 된다.

인연으로 이루어진-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이 색과 소리와 맛과 촉감과 만나서 인식하는 느낌이나 생각은 오래 머물러 있지 않다. 그것은 급류처럼 흘러가기 때문에 놓치지 않으려고 꼭잡고 있으면 어느 듯 즐거움은 괴로움으로 변해간다. 

그러므로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의 오감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처럼 산책길에서 맛보는 상쾌함도 싱그러움도 마음에 담아 놓지 말아야 한다, 마음이 깨끗하게 비었을 때 더 상쾌함과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산책길의 중간중간 너른 공간에는 여러 가지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다. 그곳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운동을 한다. 기계의 손잡이를 잡고 빙글빙글 돌리며 상체 운동을 하는 사람과 기구를 타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지난 밤의 일인지 아니면 더 오래 전의 사건일 수도 있는 이야기로 수다의 꽃을 피운다.

기계의 삐꺽거리는 소음과 떠들고 웃는 소리는 파문처럼 퍼져간다.

세상에서 제일 편하고 한가한 사람은 나 밖에 없을 거라고 우리집 보살이 가끔 말하는데 이 새벽길에서도 나처럼 한가로운 사람은 별로 없는 듯 하고 다들 무언가에 바쁘고 열심이다.

영랑호변의 산책길을 한가롭고 평화롭게 걷고 있으려니 햇살이 구름 위에 신비로운 노을을 수놓으며 대지에 찬란한 빛을 뿌리고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호수에서 비상한 백학 두 마리가 내 머리 위를 너울너울 날아서 저만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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