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고향 친구에게

데카르트와의 산책

빛속으로 2009. 8. 21. 12:27

 

 

 

데카르트와의 산책

 


데카르트(1596~ 1650)는 프랑스 태생으로 해석기하학의 창시자며 또한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린다고 백과사전 인명편에 수록되어 있다.

는 모든 것을 회의한 다음 회의하고 있는 자기의 존재는 명석하고 분명한 진리라 보고,
"모든 존재하는 것은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말했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데카르트 말을 인용하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의 말과 같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하면, 생각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논리다.

그럼 무생물인 나무나 돌이나 광물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물건인가?
잠이 들어서 아무 생각도 없다면 깊은 잠의 수렁에 빠진 순간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인가?
고요한 삼매에 들어 있거나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은 뭐지?
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논리가 서지 않는다.

그의 사유는 깊고 비범하지만 그러나 완벽하지 않아서 사유할수록 의혹과 모순만 증폭시키므로 난 데카르트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생각이란 찰나로 일어났다 사라져간다.
그것은 바위에 부셔지며 하얗게 죽어가는 파도와 같다. 파도는 어느 새 밀려와 백사장 위에서 부셔진다.
찰나로 일어났다 사라지는 생각은 잡을 수 없는 허수아비의 꿈과 같고 아침 햇살에 사라지는 이슬방울과 같고 포말 같으며 환상과 같다.
눈이 모양을 보고 좋아하는 느낌과 생각, 싫어하는 느낌과 생각,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느낌과 생각이 나오고,

귀가 소리를 듣고 좋아하는 느낌과 생각, 싫어하는 느낌과 생각,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느낌과 생각이 나오고,

코가 냄새를 맡고 좋아하는 느낌과 생각, 싫어하는 느낌과 생각,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느낌과 생각이 나오고,

혀가 맛을 보고 좋아하는 느낌과 생각, 싫어하는 느낌과 생각,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과 생각이 나오고,

몸이 촉감을 인식하고 좋아하는 느낌과 생각, 싫어하는 느낌과 생각,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과 생각이 나오고,

뜻이 법을 만나므로 좋아하는 느낌과 생각, 싫어하는 느낌과 생각,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과 생각이 나와서 무한한 법계가 펼쳐진다.

생각은 본래 어떤 실체가 있지 않으며 다만 눈,귀,코,혀,몸,뜻의 여섯 감관이 색(형상),소리,냄새, 맛, 촉감, 법 여섯 대상을 만나서 인식하므로 각가지 느낌과 생각이 나오는 것이며, 여섯 감관이 여섯 대상을 만나지 않는다면 느낌과 생각은 일어나지 않는다.

무시로 일어났다 사라지고 변하는 느낌과 생각과 의지와 인식을 <나>며 <나의 존재>라고 한다면 그것은 신기루가 실제로 있다고 믿고 환상을 쫓는 것과 같다.
신기루를 좇아가도 영원히 만난 수 없는 것과 같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하는 것은 바르고 진실한 말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데카르트를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위대하게 평가하나 그의 논리는 완젼무결하지 않고 헛점 투성이다.

특히 동물은 영혼을 갖지 않기 때문에 생각할 수도 느낄 수도 없다고 했는데 동물도 인간과 똑같이 생각하며 좋아하거나 싫어하며 두려움도 느낀다. 

그의 사유가 비록 특출하지만 곳곳에 오류가 있으며 그러한 까닭에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는 수식은 너무 과장된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는 표현은 과장된 수식이라 했다고 해서 데카르트의 영혼이 자신의 자존심과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찾아와서 따진다면 난 그의 손을 다정히 잡고 설악산 공원에서 비선대로 오르는 길을 따라 걸으며 혹은 동해 파도가 철썩이는 바위에 앉아서 대화를 나눌 것이다.

"우리의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구성되어 있고 수상행식(느낌, 생각, 의지, 인식)의 이름으로 이루어졌으며 안,이,비,설,신,의(눈,귀,코,혀,몸,뜻) 여섯 감관이 색,성,향,미,촉,법(형상,소리,냄새,맛,촉감,법)의 여섯 대상을 만나서 요지경처럼 끊임없이 생각과 느낌은 변화합니다.

요지경처럼 변화하는 생각에서 나라고 할 것은 없습니다.

생각이란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비누방울이 피어나도 그곳에 아무 것도 없는 것과 같이 그처럼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빈 것인 줄 깨달아야 하며 그렇게 알고 생각과 느낌에 집착하지 않으면 거칠고 악한 마음은 잘 길들여지고 순종하므로 평온과 안락을 얻습니다."

라고 그에게 말할 것이다.

또한 그는 

"동물은 영혼이 없기 때문에 생각할 수도 느낄 수도 없다."

라고 주장했는데 그것에 대하여, 

"데카르트여, 동물은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생각할 수도 느낄 수도 없다고 했나요?"

라고 다시 확인하며 물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이 틀림없고 대답한다면.

"난 수학에 대하여 잘 모릅니다. 그래서 당신의 해석기하학에 대하여 논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진실하며 바르고 아름다운 말입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을 마치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잘못이고 허물이 됩니다.

동물은 영혼이 없기 때문에 생각할 수도 느낄 수도 없다는 말은 고래가 산에서 산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스스로 오물을 뒤집어 쓰고 지혜로운 사람의 비웃음을 받음과 같습니다. 

데카르트여, 개나 코끼리와 같은 동물을 훈련시키는 것을 보셨나요?

훈련을 받는 개나 코끼리 사자 원숭이 등의 동물들은 조련사의 지시를 따라 앉으라며 앉고 서라면 서고 구르라면 구르고 가만히 있으라면 가만히 있지요.

만약 동물에게 영혼이 없어서 생각하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면 아마 조련사는 동물들을 앉거나 뛰거나 집을 지키거나 마약을 찾거나 맹인을 인도하는 것과 같은 훈련시킬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애완용 동물을 키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애완용 동물들은 주인의 말과 느낌까지 압니다.

화초를 키우는 사람은 화초와 대화를 나누기도 하며, 물에도 감정이 있어서 부드러운 말을 하면 고운 결정체가 되고, 화를 내거나 욕을 하면 거친 결정체의 모양으로 변한다고 분석하여 사진으로 찍은 영상도 보았는데 그런데 하물며 동물이 느낌도 없고 생각도 없다는 주장이 정당하며 바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나 자기가 사는 동네는 잘 안다.

동네의 생김새나 마을 사람과 풍습과 예절과 거리의 풍경 등을 잘 알므로 누가 물으면 자세하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처럼 영혼에 대하여 데카르트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난 여러 가지 예를 들어가면서 설명해 줄수 있을 것이다.

개미 파리 거미같은 곤충과 개 닭 돼지의 가축과 산에 사는 짐승이나 물고기를 축생이라고 하는데 그가 직접 축생으로 태어나면 동물에게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느낌이 있는지 없는지를 분명하고 명백하게 알 것이다. 

축생으로 태어나는 것은 단지 어리석음 때문인데 그의 어리석음이 축생으로 태어나서,

"아, 동물 뿐 아니라 모든 만물에는 영혼이 있고 생각이 있고 느낌이 있구나!"

라고 확실히 깨달을지 모르겠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위대한 철학자가 말했다고 하여 존재의 소멸을 두려워하면서 끊임없이 생각을 좇아가는 것은 망상의 샘물을 퍼 마시는 것과 같다.

무시로 일어났다 사라지는 생각이란 길들이지 않은 야생마와 같으며 숲속의 원숭이와 같고 독사나 늪의 악어와 같다. 무작정 생각을 따라나섰다가는 낭패 당하기 십상이니심과 걱정의 비를 맞고, 슬픔과 고통과 불안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며, 두려움과 절망의 황야를 헤매게 된다.

이러한 즉 어리석은 그 말을 어찌 진리라 하겠는가!

생각이란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않고 강물에 흘러가는 낙엽과 같으며 신기루처럼 허망하고 물방울처럼 빈 줄 알아 집착하지 않으면 근심과 슬픔과 괴로움은 사라지고 지극한 평안을 얻는다.

이 말은 거짓이 없고 진실하며 지극히 미묘한 법으로 지혜의 샘과 같다.

고요하고 맑고 밝은 지혜의 샘물을 데카르트에게 권한다.


       각우 / 윤철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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